[일과 영성]
3. 일은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다
고전 7:17, 벧전 2:9, 롬 1:17
<일과 영성>이라는 설교 시리즈를 통해서 성경적 노동관/직업관에 대해서 살펴보는 중이다.
(1) 하나님처럼 일하고 하나님처럼 쉬라: 일은 형벌이 아니라 축복이다
(2) 세상에 하찮은 일은 없다: 모든 일이 고귀하다. 일에는 귀천이 없다(정신/육체노동).
오늘은 (3) 일은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다.
2가지 포인트를 말씀드리려고 한다.
(1) 일은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다.
(2) 일은 가치를 입증하는 수단이 아니다.
나의 현실, 내가 사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의도, 그것이 기록된 성경에 맞추어 보자.
1. 일은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다.
소명(召命)은 부를 소(召), 생명, 목표물, 명령 명(命).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일
사명(使命)은 맡겨진 임무
소명은 부르심이고, 사명은 부름 받은 자에게 주어진 임무다. 부르셔서 어떤 일을 맡기셨다.
소명 없이 사명 없고, 사명감 없는 소명 없다.
(1) 부르심의 2가지 의미
(a) 종교적 의미
벧전 2:9에 나오는 ‘부르심’은 그리스어로 ‘칼레오’이다. 영어로는 calling이다.
이것은 구원과 관련된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벧전 2:9) 구원의 부르심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에클레시아(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라는 교회라는 단어가 나왔다.
따라서 부르심은 구원과 교회를 의미하는 말이다.
죄와 어두움에서 부름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아 교회를 이루게 되었다.
(b) 사회/경제적 의미
그러나 칼레오/부르심/calling에는 사회/경제적 의미에서의 부르심으로도 쓰인다.
고전 7:17에서는 그런 의미에서의 부르심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처지’? 할례자/비할례자, 노예/자유인, 혼인/미혼자이나 과부 등의 신분, 직업, (혼인)상황을 말한다. 이런 것들도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직업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셔서 맡겨주신 소명이고 천직이라는 말이다.
(우리 문화권에서는 소명을 천직으로 말하기도 한다. 천직(天職) 하늘에서 부여받은 타고난 직업)
구원으로의 부르심과 직업으로의 부르심은 둘 다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이고 소명이다.
(2) 직업은 부르심/소명이다
(a) 나 자신을 위해서 일할 때 그 일/직업은 Job이다.
돈을 벌기 위해서, 성공을 위해서, 자기개발, 성취 욕구, 자아실현을 위해서 하는 Job이다.
그러나 일/직업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생각할 때 그 일/직업은 소명/Calling이 된다.
그리고 직업이 소명일 때 그 직업은 성직이 된다!
(b) 모든 일/직업이 성직이 된다
보통 성직이라고 하면 목회를 말한다. 목회자는 직업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사람을 목회자로 부르셔야 한다. 그래서 목회자로서의 calling이 있느냐, 목회자의 소명을 받았냐고 묻는다. 아무나 자기가 하고 싶다고 목회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범위를 좀 넓혀보면, 모든 일/직업이 성직이 된다. 모든 일/직업은 하나님이 부르셔서 맡겨주신 일이고 그런 마음으로 일을 할 때 나의 일은 소명이고, 모든 일/직업은 성직이 된다.
(c) 만인제사장설과 직업 소명론
벧전 2:9 ‘택하심을 받은 족속, 왕과 같은 제사장, 거룩한 민족,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
누가 이런 사람이라고? 예수 믿는 모든 사람!
유대인만이 아니라, 레위지파 제사장만이 아니라, 예수 믿는 모든 사람!
이것을 만인제사장설이라고 한다. 성직자/목회자 만이 아니라 만인(모든 사람)이 제사장/사역자가 된다는 말이다. 목회자나 평신도의 구분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귀한 일/사역을 할 수 있다.
신앙적인 일, 교회 내에서의 일이라는 범위의 제한이 있다.
그러나 교회의 범위를 넘어설 때 직업 소명론이 된다.
모든 직업(종교적이건 세속적이건)은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이다. 그 부르심에 응해서 소명으로서 일을 할 때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고 성직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d) 이것은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마르틴 루터의 주장이었다.
종교개혁은 칭의론에서 시작되었다. 롬 1:17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행위로가 아니다.
그러나 일반 성도에게 더 파급력이 컸던 것은 만인제사장론이었다. 성직자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제사장이다.
그러나 종교를 떠나 일반인에게 더 파급력이 컸던 것은 직업 소명론이었다. 루터는 이렇게 가르쳤다. “악한 일이 아닌 이상 모든 직업은 하나님의 부르심 곧 소명이고, 그 일은 성직이다. 우리가 각자 일터에서 하는 일은 ‘하나님의 가면’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돌보실 때 우리의 직업을 사용해서 일하신다는 뜻. 직업이라는 가면 뒤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3) 현실적인 이야기
(a) 신자유주의(국가권력의 시장개입을 비판하고 시장의 기능과 민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중시하는 이론)와 세계화(경제, 문화, 정치,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국가 간 상호 의존성과 교류가 증가하는 현상) 정책 이후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사라져 버렸다.
이직도 잦고 커리어 변경도 많다. 비정규직의 상시화, 프리랜서, N잡러 등 직업에 대한 개념 자체가 급변한 시대다. 돈 많이 주면 언제든지 직장을 옮기는 시대. 돈보다 워라벨이 더 중요한 시대
이런 시대에도 직업이 소명이고, 소명으로서의 직업은 성직이라는 말이 통할까? 너무 시대와 동떨어진 말은 아닌지?
처음부터 나의 현실, 내가 사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의도, 그것이 기록된 성경에 맞추어 보자고 말했다.
시대가 많이 변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은 여전하다.
내가 하는 일/직업이 단순히 돈 벌어서 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 일로 나를 부르시고 그 일에 필요한 재능과 기회를 주신 소명이라고 믿으며 살아가기를 바라신다.
그렇게 하면 일을 대하는 나의 자세/입장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많은 사람이 그런 자세로 일하게 된다면 완전히 다른 사회가 될 것이다.
예)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미국, 영국, 독일, 네덜란드 등 개신교가 들어선 나라가 이탈리아, 스페인 등 가톨릭 영향이 강한 나라에 비해 경제 성장이 빠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연구 결과 금욕적 개신교의 직업 윤리관이 합리적 생활을 중시하는 근대 자본주의 정신을 탄생시킨 핵심이었다고 발표했다.
그 내용 안에 칼빈의 직업 소명론이 있다. 세속 직업이 하나님이 주신 소명인 줄 알고 그 직업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또 그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는 칼빈의 직업 소명론이 자본주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고, 이들 나라에 발전을 주었다는 내용이다.
(b) 직업 소명은 천천히 찾게 된다
청년 때부터 직업 소명을 알고 그 일을 평생하게 될 수만 있다면 큰 축복이다. 그러나 청년 때는 대체로 소명을 찾아나가는 시기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직업과 소명의 경지로 발전해 나간다고 한다. 어떤 이는 ‘나이 오십이면 천명을 안다’(五十而知天命)는 말로 설명하기도 한다. 많은 것을 경험해 보고, 경제적 기반과 실력을 쌓아나가면서 자신의 직업 소명을 깨달아 나가게 되기도 한다.
예) 이동기 전도사: 증권맨에서 교육자로
이직/커리어 전환? 소명이 중간에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하자. 그 기간 동안은 소명/천직이라고 여기면서 성실히 일하자.
목회 소명만이 아니라 직업 소명이 있다는 것만은 기억하자.
직업이 소명이고, 직업이 성직이다.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2. 일은 가치를 증명하는 수단이 아니다
(1) 일/직업이 자신의 전부처럼 느껴진다.
일의 보수, 지위, 성과가 내 인생의 성적표인냥 살아간다. 그래서 일에 인생을 건다.
‘나 이런 일도 해 낼 수 있어, 나 연봉이 이 정도 되는 사람이야, 나 사업으로 이만큼 돈 번 대단한 사람이야, 나는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회사/직업을 가진 사람이야. 나는 이런 업적을 남긴 대단한 사람이야....’
그러나 그 일에 인생을 건 결과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다.
더 이상 돈을 벌지 못하게 되거나, 일/직업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면 자신의 존재감 마저 사라지는 것 같다. 은퇴 후에 극심한 상실감과 우울감. ‘내가 돈 버는 기계였나?’ ‘나 아무 것도 아닌가?’
일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수단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는 일이 뭔가에 따라서 가치가 입증된다는 세상적 노동관과의 싸움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적 노동관을 배우고 붙들어야 한다.
내가 하는 일이 나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다.
(2) 루터의 칭의론
롬 1:17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납니다.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 받음, 그래서 의인이 됨이다. 루터는 오랜 동안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했다. 수도사로서 철저한 고행과 신앙 훈련을 했음에도 마음 속에 있는 죄책감을 떨칠 수 없었다. 양심적인 사람!
그러다가 성경을 통해서 그런 행위(종교적 수행)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 해결하심, 나는 이제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음)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혁명적인 전환이었고 종교개혁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루터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비로소 '하나님의 의'란, 의인은 주님의 선물, 다시 말해 믿음으로 산다는 뜻이란 사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거듭나서 열린 문을 통해 낙원에 들어갔음을 여기서 절감한 것이다. 성경 전체가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왔다.”
이런 깨달음을 칭의론이라고 한다. 그러나 루터 자신의 말처럼 이것을 통해서 성경 전체를 새로운 빛으로 보게 되었다. 그 결과 일/직업에 관해서 이런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a) 직업에 성속이 없다: 종교적 거룩한 직업(고행, 신앙 훈련 등)으로도 의롭다 함(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성직이라고 우월해 할 이유가 없다. 종교적인 행위가 하나님의 의을 얻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다른 세속적 일반 노동보다 조금도 우월할 게 없다.
(b) 직업은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지 못한다: 옛 수도사들은 종교적인 행위로 구원을 받으려 애썼던 반면, 대다수 현대인들은 직업적인 성공에서 구원(경제적 안정, 자아실현, 자존감, 성취욕구 해소)을 찾으려 한다. (구원을 이런 의미로 사용하는 것에 유의!)
그러다보니 오직 돈 많이 주는 곳으로 이직하고, 남들이 알아주고 부러워하는 직업에 목을 메고, 높은 지위를 보장하는 자리를 추구하며, 옳지 못한 방식으로라도 일하면서 그런 일들을 ‘섬기게’ 되었다. 일/직업이 자신의 가치를 보여주고 그런 의미에서 자신을 구원해 주는 우상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복음은 일/직업으로 자신을 입증할 필요가 없다고 알려준다. 믿음으로 이미 인정받고 안전해졌으므로 달리 애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남들이 애쓰고 수고해서 얻으려는 것들(구원, 자부심, 선한 양심, 평안 따위의)을 크리스천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하고 있으므로, 이제는 그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일하면 그만이다. 일이 이웃 사랑의 수단이다. (이 부분은 다음 시간에)
결론과 도전
(1) 일은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다.
내가 하는 일/직업은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다. 그 일/직업을 위해서 재능과 기회를 주셨다.
나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여긴다면 그 일은 성직이 된다.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이런 생각을 가지고 현재 하고 있는 일/직업에 임하고 있는지?
왜 아닌지?
(2) 일은 가치를 입증하는 수단이 아니다.
나의 가치는 이미 예수님 안에서 입증되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하나님께 인정받고 안전하게 되었다.
일/직업이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 나의 가치를 입증하지 못한다.
자칫 일/직업이 나의 우상이 될 수 있다.
믿음으로 자신의 가치가 입증되었다고 믿는지? 온갖 종류의 구원(자존감, 안정감, 인정..)을 얻었다고 믿는지?
그게 아니라서 여전히 일/직업이 나의 우상인지?
2024/9/15 주일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