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서]

4. 죽으면 죽으리이다

본문: 에스더 4장(13-17)

서론: 섭리는 믿음의 결단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단순히 '하나님이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는 수동적 진술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섭리는 하나님의 주권(Divine Sovereignty)과 인간의 자유의지(Human Free Will)가 신비롭게 조화를 이루는 방식이다. 섭리의 3요소(보존, 협력, 통치) 중 협력은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와 선택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강제되거나 방해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계획을 구체화하는 도구로 쓰임을 알려준다.

에스더 4장은 바로 그런 장면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에스더를 미리 왕후로 세우셨지만, 그 섭리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에스더의 자발적인 결단과 순종이 필요했다. 섭리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지고 순종하는 인간을 통해 구현된다. 에스더가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하나님의 계획은 역사 속에서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본문 전개

1. 모르드개의 요청과 에스더의 두려움(4:1–11)

모르드개는 하만의 칙령을 접한 후, 성문 앞에서 굵은 베옷을 입고 대성통곡을 했다.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사정을 듣고 자세한 상황을 파악하고자 궁전 내시 하닥을 보냈다. 하닥을 통해 왕의 명령과 민족의 위기에 대해서 들었다. 뿐만 아니라 직접 어전에 나아가서 왕에게 자비를 구해달라는 모르드개의 요청을 들었다.

에스더의 첫 반응은 냉철한 현실 인식과 이에 따른 두려움이었다. 에스더가 떠올린 현실은 이랬다. 

(a) 왕의 부름 없이 왕에게 나아가는 자는 누구나, 심지어 왕후일지라도, 죽임을 당할 수 있다. 

(b) 자신은 이미 한 달 동안 부름받지 못한 상태였다. 왕의 총애를 받지 못하는 처지일 수 있다.

질문: 왕의 부름 없이 나아가면 왜 안 되나? 심지어 왕의 부인인데도? -> 에스더가 너무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 아닌가?

이런 부분은 현대적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고대사회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1) 절대왕정 체제에서 왕은 신적인 존재에 가까웠다

왕이 있는 곳은 신성한 공간이었고, 아무나 마음대로 접근할 수 없는 성역으로 간주되었다.

(2) 권위 보호와 암살 방지 목적

궁궐 안에는 수많은 권력투쟁이 있었기 때문에, 왕실 경계는 극도로 엄격했다. 따라서 "임금의 부름 없이 안뜰에 들어가면 사형"이라는 규정은 암살이나 정변 등을 방지하려는 안전 장치였다.

(3) 왜 부인조차도 마음대로 못 만났는가?

(a) 고대 사회는 왕과 왕비의 관계가 지금의 ‘사랑’ 중심의 부부 관계와는 달랐다.
왕비는 후계자를 낳고 왕실의 명예를 지키는 공식적 지위를 가진 존재였다. 따라서 남편과 아내라기보다, 왕과 궁중의 직책자 관계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b) 사실 사랑 중심의 부부로서 한 침실을 사용하는 개념은 인류 역사를 볼 때 최근에 일어난 현상이다. 인류에게 결혼은 사랑이라는 감정적 유대관계로 맺어지는 게 아니라 주로 정치적, 경제적, 혈통적(후손) 목적을 위한 계약이었다. 부부는 서로 친밀한 감정적 유대를 기대하지 않았고, 각자의 생활 공간을 갖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서양은 17세기 계몽주의 이후에 비로소 개인의 감정과 선택을 중시하는 흐름이 생겨났다. 하지만 상류층은 여전히 전통적인 방식인 정략 결혼이 주를 이루었고 각자의 침실을 사용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동양도 마찬가지였다. 고려와 조선 사회에서 결혼은 대부분 정략결혼이었고, 당사자의 감정(사랑)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부모의 결정이나 사주팔자가 결혼 조건의 핵심이었다.

(c) 그러다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핵가족화(부모와 자녀 2대)가 본격화되며 사랑 중심의 결혼이 대중문화와 교육을 통해 확산되었다. 가정이 점점 개인의 행복과 만족을 중시하게 되면서, 부부가 한 침실를 사용하는 것도 일반적인 일이 되었다.

(d) 혁명적인 복음의 가르침(고전 7:3-5)

5절 서로 물리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기도에 전념하기 위하여 얼마 동안 떨어져 있기로 합의한 경우에는 예외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다시 합하십시오.

1세기 로마시대 즉 남성 중심이고 아내는 소유물처럼 여겨지는 결혼관의 시대에 주어진 혁명적인 말이다. 부부가 상호 존중, 사랑과 존중을 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은 부부는 반드시 한 침실을 사용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부부가 서로의 육체(성)을 존중하고, 사랑과 책임 가운데 성실하게 서로에게 헌신하라는 명령이다. ‘서로 물리치지 말라’는 말은 의도적으로 부부관계를 거부하거나, 금욕하지 말라는 말이다. 이는 영지주의(영은 거룩, 육은 악)의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 잡기 위함이다.

(4) 게다가 에스더는 30일간 왕에게 부름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에 4:11).
이는 그녀가 왕의 총애를 잃었을 가능성을 의미하며, 그 상황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것은 왕의 불쾌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이 경우, 당시 페르시아 법에 따라, 왕이 금 규(황금 홀, scepter, 왕의 권위와 주권을 상징하는 지팡이)을 내밀어야만 그 사람이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에스더는 자신의 행동이 실제로 목숨을 거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결론: 에스더가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왕에게 나아간다는 것은 이런 여러 가지를 고려해 볼 때 그야말로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그런 현실을 분명히 인지했고, 이에 따른 두려움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말하며 나섰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에스더는 처음부터 용감한 영웅이 아니었다. 그녀도 평범한 사람처럼 현실적인 계산을 하고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런 현실과 두려움에 주저 앉지 않았다.

2. 모르드개의 도전과 에스더의 소명(4:12–14)

모르드개는 에스더의 메시지를 듣고, 그 유명한 신앙적 도전의 말을 보냈다. 

4:14 이런 때에 왕후께서 입을 다물고 계시면, 유다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라도 도움을 얻어서, 마침내는 구원을 받고 살아날 것이지만, 왕후와 왕후의 집안은 멸망할 것입니다. 왕후께서 이처럼 왕후의 자리에 오르신 것이 바로 이런 일 때문인지를 누가 압니까?

이 말씀은 에스더서 전체의 핵심 메시지이다. 모르드개는 하나님의 구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고백하면서도, 에스더가 그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소명을 일깨웠다. 이것이 바로 섭리의 본질이다. 섭리는 하나님이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이끌어 가시지만, 인간의 자유롭고 책임있는 응답을 요청한다. 하나님은 구원을 이룰 수 있는 분이지만, 그 구원의 역사에 우리를 참여시키기 원하신다.

3. 에스더의 결단: “죽으면 죽으리이다”(4:15–17)

모르드개의 말을 듣고 에스더는 결단했다. 그녀는 백성들에게 금식과 중보를 요청하고, 자신도 몸과 마음을 준비했다. 

에스더의 헌신은 맹목적인 헌신이 아니었다. 현실의 엄중함을 모른 채, 그 현실이 의미하는 바도 모른 채 그저 맹목적으로 나선 헌신이 아니었다. 자신의 생명을 걸면서 하나님의 섭리에 응답하는 헌신의 결심이다.

에스더의 결단은 우리의 믿음의 모델이 된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러한 사람의 용기를 기다리며, 그것을 사용하셔서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섭리를 맡길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신다.

결론: “바로 이런 일 때문인지를 누가 압니까?”

에스더는 두려움에서 결단으로 나아갔고, 왕실의 법도와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분명한 현실파악을 하였지만 결국 믿음으로 하나님이 이루실 미래를 향해서 나아갔다. 결국 그녀의 결단과 헌신은 유대인 동족의 생명을 살렸고,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는 통로가 되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우리의 위치, 환경, 직업, 배경, 심지어 두려움까지도 섭리로 사용하실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때’를 인식하는가, 그리고 믿음으로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이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은 무엇인가? 나는 섭리의 흐름에 순응하고 있는가, 회피하나? 오늘 하나님이 나에게 요청하시는 ‘죽으면 죽으리이다’의 결단은 무엇인가?

6/11/2025 수요예배